비타민C 바다를 삼킨 병/괴혈병이 바꾼 인류의 역사/소설 같은 이야기 (1/5편)

여자가 카트를 가지고 오렌지를 담고있다. 오렌지가 가득진열된 마트배경.

지금 우리는 마트에서 오렌지 한 봉지를 아무렇지 않게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그 흔한 과일 한 조각이 없어 사람이 죽어 나갔다면 믿으시겠어요.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어요.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만, 무려 약 200만 명이 넘는 뱃사람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됩니다. 폭풍보다도, 난파보다도, 전투보다도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 무언가가 배 안에 있었던 거예요. 오늘은 그 무서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게요.

설렘으로 시작된 항해

때는 대항해시대였어요. 15세기부터 유럽의 배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몇 달씩 바다를 건넜지요. 돛을 올리고 항구를 떠날 때, 선원들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을 거예요. 미지의 땅, 진귀한 향신료, 그리고 부와 명예가 저 바다 너머에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배에는 오래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실었어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쇠고기, 그리고 '하드택'이라 불리던 딱딱한 비스킷이었지요. 이 비스킷은 밀가루와 물, 소금만으로 만들어 두세 번씩 구워 낸 것이었어요. 얼마나 단단했는지, 이로 깨물어 먹을 수 없어 손으로 쪼개거나 국물에 불려 먹어야 했다고 해요. 여기에 말린 콩이나 완두콩, 그리고 물 대신 마시는 맥주나 럼주가 전부였습니다.

이 식단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신선한 과일과 채소였지요. 며칠이면 상해 버리니 배에 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의 씨앗이 되었답니다.

배 안에 퍼지기 시작한 그림자

항해가 한두 달을 넘어서면, 배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저 기운이 없는 정도였어요. 늘 씩씩하던 선원이 갑판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지요. 관절이 쑤신다고 호소하기도 했어요. 다들 긴 항해에 지친 탓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증상은 점점 무서워졌어요. 살짝만 부딪혀도 멍이 시퍼렇게 들었어요. 잇몸이 부어오르고 피가 배어 나왔지요. 나중에는 멀쩡하던 이가 흔들리다 툭 빠져 버렸어요. 심한 경우에는 머리카락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이것이었어요. 몇 년 전에 다 아물었던 상처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벌어진 거예요. 오래전 전투에서 입은 흉터가 마치 어제 생긴 상처처럼 되살아났습니다. 심지어 오래전에 다친 뼈 부위에 다시 통증이 생기거나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몸이 스스로를 붙들고 있던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요.

그리고 끝내,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숫자로 남은 비극

이 병에는 괴혈병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피가 새어 나온다는 뜻이지요.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에 남은 숫자를 보면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 1499년, 바스쿠 다 가마의 첫 인도 항해에서 170명 중 11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이 괴혈병으로 숨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 1744년, 조지 앤슨 제독은 4년간의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 1,854명이었던 선원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188명뿐이었습니다.
· 긴 항해에서 선원의 절반을 잃는 일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 18세기에는 전투로 죽은 선원보다 괴혈병으로 죽은 선원이 더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앤슨 제독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은, 훗날 제독이 된 오거스터스 케펠이었어요.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카락과 이를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괴혈병은 폭풍과 난파, 전투, 그리고 다른 모든 질병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목숨을 바다에서 앗아갔습니다.

아무도 원인을 몰랐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도 원인을 몰랐다는 점이에요.

당시 의학은 2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의 이론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몸속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이 무너지면 병이 생긴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괴혈병의 원인을 두고 온갖 주장이 쏟아졌어요. 나쁜 공기 탓이라고도 했고, 습기와 추위 때문이라고도 했어요. 게으름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심지어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치료법은 더 딱했어요. 바닷물을 마시게 하거나, 피를 뽑거나, 황산을 섞은 약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게으름이 원인이라 믿은 사람들은 오히려 환자에게 일을 더 시키기도 했어요. 흙을 그리워해서 생기는 병이라며, 환자를 흙 속에 파묻는 처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오히려 환자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었어요.

어렴풋한 단서 하나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모두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어떤 배는 유난히 환자가 적었어요. 항구에 잠시 들러 신선한 과일을 실었던 배였지요. 병에 걸린 선원이 육지에 내려 며칠 지나면 거짓말처럼 기운을 되찾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눈치챈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1593년, 영국의 리처드 호킨스 제독은 오렌지와 레몬 즙이 괴혈병에 좋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734년에는 네덜란드 의사 요하네스 바흐스트롬이 신선한 채소가 괴혈병을 막는다며, '항괴혈병'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냈어요. 그는 괴혈병이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일 수 있다고 처음으로 짚어 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어요. 뱃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육지의 학자들은 그것을 그저 떠도는 이야기로 여겼거든요.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 답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 볼게요.

· 괴혈병은 대항해시대 뱃사람들을 덮친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 16~18세기에만 2백만 명 이상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잇몸 출혈, 이가 빠짐, 오래전에 회복된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는 기록    이 전해집니다.
· 당시 의학은 원인을 전혀 짚어 내지 못했습니다.
· 신선한 과일이 도움이 된다는 단서는 있었지만, 학계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과일 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어리석은 비극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요.

다음 편 예고

오늘은 바다를 삼킨 병, 괴혈병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았는데요. 다음엔 그 병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뜻밖에도 마지막 열쇠는 어느 저녁 식탁에 오른 헝가리 파프리카에 있었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Scurvy》 – Stephen R. Bown
대항해시대 선원들이 괴혈병으로 겪었던 고통과, 비타민 C 발견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흥미로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역사서입니다.

🔹 《The History of Scurvy and Vitamin C》 – Kenneth J. Carpenter
괴혈병의 원인 규명부터 비타민 C의 발견과 연구 과정까지, 의학과 영양학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문 역사서입니다.

🔹 《Vitamin C: A 500-Year Scientific Biography from Scurvy to Pseudoscience》 – Stephen M. Sagar
괴혈병 시대부터 현대의 비타민 C 연구와 메가도스 논쟁까지, 약 500년에 걸친 비타민 C의 과학적 역사를 소개한 책입니다.

📖참고자료

🔹 미국 국립보건원(NIH) Office of Dietary Supplements – Vitamin C Health Professional Fact Sheet
비타민 C의 기능과 결핍 증상, 권장 섭취량 등에 관한 의학적·영양학적 정보를 참고했습니다.
https://ods.od.nih.gov/factsheets/VitaminC-HealthProfessional/

🔹 MedlinePlus – Vitamin C
비타민 C의 기본적인 역할과 섭취 방법, 복용 시 주의사항을 참고했습니다.
https://medlineplus.gov/vitaminc.html

🔹 영국 왕립 그리니치 박물관(Royal Museums Greenwich) – What is Scurvy?
대항해시대 선원들의 생활과 괴혈병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했습니다.
https://www.rmg.co.uk/stories/maritime-history/what-scurvy


※ 면책조항 (Disclaimer)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를 위한 의학적 조언이나 전문적인 처방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분 및 섭취 방법은 제조사나 전문가의 지침을 확인하시기 바라며, 개인의 체질에 따라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 본 블로그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기저질환이 있거나 임신·수유 중인 경우에는 섭취 전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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